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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찰의 본래 기능은 기도와 수행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외에도 다양한 '기능'이 부가되었고, 이런 기능들이 역으로 불교 안팎에 많은 변화를 주기도 했다.

 

비보사찰, 전 국토에 침과 뜸을 뜨다

운주사 천불천탑 비보사찰

  신라는 992년을 유지한 세계 최고의 장수 왕조 중 하나다. 또한 경주는 신라 시대 내내 수도의 위치를 내어 준 적이 없다. 그래서 경주 앞에 붙는 수식이 바로 '천년고도'다. 통상 중국의 왕조 교체 주기는 200년 안팎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고려와 조선이 500년 안팎이고 신라는 천년이나 되니 실로 대단한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왕조가 오래갈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다양한 이유가 있었겠지만 풍수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비보사탑설을 꺼내 든다. 비보사탑은 마치 한의학에서 인간의 몸에 침을 놓고 뜸을 뜨듯이 국토 즉 산천의 중요한 자리에 사찰과 탑을 건립해서 국가의 기운을 순일하고 안정되게 보충해 왕조를 오래 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비보사찰의 개념은 신라 말 그리고 고려 시대를 거치면서 더욱 비등해졌다. 실제 존재 여부가 확실치 않으나 도선(827~898)이 지었다는 「도선비기道詵秘記」에는 모두 3,800개의 비보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 책은 실제 존재 여부를 떠나 비보사탑설이 당시 조정이나 민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방증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런 비보사찰은 평지뿐 아니라 산속에도 많았다. 이는 우리나라 사찰이 산속으로 들어간 또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국가 차원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산천에 들어서는 사찰이 불교의 보급과 확대에 매우 긍정적인 역학을 했음은 당연하다. 하지만 비보사찰의 논리는 역으로 불교의 쇠퇴를 설명하기도 한다. 지세와 풍수를 고려하지 않고 아무 곳에나 사찰이 들어서게 되면 국가와 불교의 명운이 단축되었다는 논리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고려 태조 왕건이 박술희에게 전해서 후손들에게 경계하게 했다는 열 가지 조항인 <훈요십조訓要十條>에는 '설치된 사찰들은 풍수지리에 따라서 정해 놓은 것이니 함부로 사찰을 창건해서 지덕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다. 또 이와 함께 '신라가 망한 것이 신라 말에 과도한 사탑이 건축되어 지덕이 손상된 결과이니 경계'하라고 하였다.

 

역참驛站 기능을 했던 사찰

  어느 국가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지만 국교國敎가 지정되면 해당 종교의 사원은 주요 도시나 이동 통로에 별처럼 늘어서게 된다. 때로는 숫자가 많아지면서 국가가 하지 못했던 여러 기능들을 하게 되는데 대표적인 의료나 역참의 기능을 들 수 있다.

 

  종교시설은 특성상 개방적이며 다수를 수용할 수 있는 일정 규모 이상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거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가 쉽다. 그리고 이렇게 발달하다 보면 종교시설을 연결하는 길이 만들어지고 이것이 곧 국가의 주요한 교통로가 되기도 한다. 사찰이 역참의 기능을 담당했다는 것은 역원이라는 명칭에 절을 나타내는 '절 원院' 자가 들어가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런 역참 기능을 동시에 담당했던 사찰들은 고려 시대의 것들이 눈에 띄는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뚫린 고갯길인 충북 충주 하늘재의 미륵대원, 영남에서 서울로 올라갈 때 꼭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자리 잡았던 경북 안동의 제비원 그리고 개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꼭 거쳐야 했던 경기도 파주의 혜음원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혜음원은 규모가 무척 거대했던 정황이 발굴을 통해 확인되었다. 사찰과 별도로 숙박시설이 따로 갖춰져 있었고, 여기에 행궁까지 겸비되어 있었을 정도이다.

 

왕의 명복을 빌었던 능침사찰

  죽은 선왕의 사후 명복을 빌고 재를 올린 목적으로 건립된 사찰도 있는데 이를 능침사찰이라고 한다. 이런 능침사는 숭유억불기인 조선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대표적인 능침사찰 중 하나가 바로 경기도 광릉의 봉선사다. 봉선사가 자리 잡고 있는 광릉은 세조, 즉 수양대군의 무덤이다. 고려 시대에 운악사라는 이름으로 있던 절을 능침사찰로 지정해 이름을 선왕을 받든다는 뜻인 봉선사로 바꾸고 크게 중창했다. 또 유명한 능침사로는 서울 강남의 봉은사가 있다. 봉은사는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의 주역인 제11대 중종의 정릉을 위한 사찰이다. 봉선사와 봉은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능침사찰에는 '받들 봉奉' 자가 주로 들어간다. 이는 임금의 은덕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이외에 능치사찰 같지 않은 명칭의 능침사찰인 경기도 화성의 용주도 빼놓을 수 없다. 용주사는 정조가 뒤주 속에서 죽은 비운의 왕세자인 부친 사도세자를 위해서 천하의 명당에 이장한 융릉의 능침사이다. 사도세자는 정적들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고, 무덤마저도 형편없는 곳에 쓰였다. 이를 한탄하던 정조가 천하의 명당을 수소문해서 찾은 곳이 바로 현재의 융릉 자리다. 그러나 이곳은 한양에서 80리 안에 왕릉을 설치해야 한다는 규정에서 벗어난 88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이곳이 천하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음에도 왕릉이 되지 못한 이유다. 그러나 정조는 왕명으로 이를 80리로 고치도록 했다. 왕명에 의해서 축지법이 단행된 것이다.

 

  이렇게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고 능침사찰로 용주사를 건설하게 되는데, 사찰의 낙성식 전날 정조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게 된다. 용이란 동아시아 왕조 국가에서는 임금을 상징하니 여의주를 문 용의 스천은 부친인 사도세자의 한이 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서상을 길이 새기기 위해서 사찰의 이름도 용주사라고 한 것이다. 용주사에도 사도세자의 원한이 효자 정조와 부처님에 의해서 풀어진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는 셈이다.

 

  또 능침사찰 중 학문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곳은 고구려 시조인 동명성왕을 위한 평양의 정릉사를 들 수 있다. 정릉사는 고구려의 사찰 양식을 알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능침사찰의 연원이 매우 오래되었음에도 알 게 된다.

 

조선왕조의 역사와 성곽을 지켰던 사찰

  조선 시대 승군의 역할은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전후의 시기에 산성 축소와 보수에 승려들이 동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일반인은 많지 않다. 현재도 북한산성 안에 승가사, 문수사, 봉국사, 도선사, 보광사, 진관사, 삼천사, 선운사가 있고, 남한산성에도 국청사, 개원사, 장경사, 망월사가 남아 있다. 본래는 더 많은 사찰들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이 또한 사라지게 된다.

 

  산성 축조 외에 전란의 시기에 「실록」과 「의궤」를 수호하는 역할을 한 사찰도 있다. 조선은 서울의 춘추관에 내사고內史庫 그리고 충주 · 전주 · 성주에 외사고外史庫를 두었는데, 이 중 전주사고본을 제외한 기록물들이 임진왜란으로 불타서 훼손되자 위기를 느낀 조정은 「실록」과 「의궤」를 강화도와 깊은 산속으로 보내기로 결정한다. 1782년 강화도 행궁에 만들어진 외규장각은 어람용 「의궤」가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곳의 관리는 전등사가 맡았다. 강화도 외에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이 사고로 지정되는데 이때 각 산에 있던 큰 절들에 사고史庫가 들어선다. 애초 묘향산에 있던 사고는 전북 무주의 적상산 적상산성 안으로 옮겨졌으며, 관리는 안국사가 맡았다.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가 관리했으며,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의 관리 속에 별도의 사고사가 설치했다. 이렇게 해서 산으로 간 조선의 대표적인 기록물들은 사찰의 영향 속에서 승려들의 손에 의해 지켜지게 된다.

 

 

 

 

 

 

 

「자현스님 " 사찰의 비밀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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