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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흥사(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고연리)는 통도사 말사로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이후 고려 말 지공대사가 중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다시 1614년 조선시대 대희선사가 재건했다. 특히 조선시대 운흥사는 경전을 간행하는 도량으로서 1672년부터 1709년까지 많은 불서가 간행되었다. 운흥사지 목판은 16종 673판인데, 현재 통도사에 보관되어 있다. 이후 어찌 된 영문인지 운흥사는 폐사되고 넓은 터와 수각 등 일부 석물만이 유물로 남아 있다.

운흥사지에는 종이 제작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수곽과 너른 돌이 남아 있다.

 

  이곳 운흥사 터에는 건물터 7동, 부도 6기, 수조 4기 등이 남아 있는데 터가 매우 크고 넓어 당시에 굉장한 규모의 대찰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이토록 크고 넓은 도량, 게다가 목판을 제작하고 종이를 인쇄할 정도로 많은 대중이 살았던 곳이 왜 한순간 역사에서 사라졌을까.

 

  1709년까지 운흥사에서는 활발하게 종이 제작과 불서 인경 작업이 진행되었지만, 1749년에 간행된 학성지에는 기록이 없다. 신라시대에 창건되어 오랫동안 역사를 이어온 사찰이 40년도 되지 않은 시간에 폐사된 것이다.

  1727년 양산군수 김성발이 통도사의 종이 부역에 대해 지적한 것처럼, 당시 통도사 말사였던 운흥사에도 상당한 지역 부담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운흥사는 경판(목판) 제작에서부터 종이 생산, 그리고 인경 작업까지 가능한 현대판 출판단지로서의 기능을 담당했다. 운흥사에서 제작한 경판은 해인사 다음으로 많은 규모다. 오늘날로 비교한다면 디자인에서 인쇄, 납품까지 가능한 종합출판단지라 할 수 있다. 특히 운흥사 인근은 닥나무가 많이 자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수량이 풍부하고 맑은 계곡을 끼고 있어 양질의 종이를 생산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이 때문에 운흥사에서 생산한 종이에 인경한 경전은 통도사뿐만 아니라 여러 사찰에 전해지며 불서 보급을 이끌었다. 또한 당시 많은 대중이 기거하고 있었기에 대량 작업이 가능했던 것도 주효했다.

 

  하지만 스님들의 불사 작업이 지역이라는 노동으로 치환되며 운흥사는 급속도로 쇠락했다. 불서 보급을 위한 종이 제작이 아닌, 나라의 압력에 의한 종이 생상이 강제된 것이다. 나라에서는 불서를 만드는 사찰마다 종이 부역을 내렸고 스님들은 과도한 노역으로 사찰을 떠나야만 했다. 특히 닥나무를 베고, 삶고, 물에 불려 두드리는 작업은 모두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작업이라 그 고통은 더욱 심각했다.

 

  대가람을 일구며 불서 제작이라는 대작불사의 원력으로 정진했던 스님들에게 가혹하고 부당한 일이 주어진 것이다. 이후 운흥사는 폐사의 길로 들어섰고 통도사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운흥사 폐사 이후 지역뿐만 아니라 과도한 부역으로 통도사 역시 폐사 직전의 위기를 처했다. 통도사 역시 종이 부역과 각종 잡역을 버텨 냈다. 1838년에 이르러서야 권돈인이 통도사에 부과된 부역을 혁파하고, 비로소 오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운흥사는 폐사 후 재건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당시 종이 부역의 폐단은 사찰의 폐사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운흥사는 질 좋은 닥종이를 생산하고 이를 인경해 내는 종합출판단지로서의 역할을 해 내고 있었다. 이는 사찰을 중심으로 한 제지기술과 인쇄문화의 발달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751년 이전에 제작된 한지로 만들어졌으며 755년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역시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견고하게 수명을 이어 가고 있다. 이는 높은 수준의 제지기술이 사찰에서 발달했으며, 불서 보급이라는 확고한 명분과 목적하에 이뤄졌음을 분명히 한다.

 

  운흥사는 오랫동안 비워져 있다가 지난 2001년에 이르러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당시 발굴된 부도는 인근으로 옮겨 문화재로 보호하고 있다. 부도의 주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나 부도를 장엄한 형태나 문양을 보면 통도사 대웅전 소맷돌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운흥사가 통도사 말사로서 통도사의 스님들이 기거하고 머물며 역사를 공유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운흥사는 오래된 절터로 남아 있지만, 불서 보급을 통해 불국토를 이루고자 했던 스님들의 간절한 염원은 생생한 오늘의 가르침으로 유전되고 있는 듯하다.

 

 

월간통도 20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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