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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는 총 2271개의 현충시설이 있다. 현충시설이란 조국의 독림, 국가의 수호 또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를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을 추모하고 이들의 숭고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기리기 위한 시설이라 명명되어 있다. 현충시설은 크게 독립운동시설과 국가수호시설로 구분된다. 독립운동시설은 일제강점기 당시 구국운동을 하다가 헌신한 이들을 기리는 시설이다. 불교계에서는 대표적으로 한용운선생 기념관(강원도 인제 백담사), 백용성 선사 추모비(경상남도 합천 용탑선원) 등이 있다. 국가수호실은 국가 수호 또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한 시설로서 대표적으로 6.25 전쟁 당시 제31육군병원 분원으로 쓰인 통도사가 해당된다. 국가수호시설은 전국에 1295건이 있으며, 그중 6.25 전쟁 관련 시설은 895건(6.25 전쟁 및 원남전쟁 포함)이다. 이들 중 통도사가 포함된 '장소' 항목에서는 17건이 있다. 그 밖에 비석 510견, 탑시설 252건, 동상 36건 등이 있다.

통도사 용화전

  현충시설의 대부분은 탐과 비석, 기념관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들 시설은 '기념'을 위해 후대에 세워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시설문은 대개 보수나 개축의 과정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현충시설은 공간의 보존보다는 그곳에서 어떤 인물의 정신을 배우고, 장소가 주는 역사적인 의미를 해석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통도사가 31 육군병원 분원으로 쓰였다는 실체를 밝히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있었다. 1951년, 당시 통도사가 육군병원으로 쓰였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고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져오고 있었다. 현충시설에 대한 고증을 당사자가 직접 소명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통도사 용화전 미륵부처님 복장에서 연기문이 발견되었고, 해당 연기문에는 불상 조성에 대한 연유가 상세히 밝혀져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사변 후 국군 상이병 3000여 명이 입사해 1952년 4월 12일에 퇴거했다."는 확실한 기록이었다. 이와 함께 통도사 대광명전 내외부 벽체에서 당시 통도사에서 치료받던 군인들의 필적으로 보이는 낙서가 여럿 발견되었다. 여기에 힘입어 대내적으로 증언을 수집하여 녹취 기록을 남겼고 이러한 노력으로 2021년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통도사 용화전 미륵불 복장 연기문 / 1952년 9월 통도사 스님들이 용화전 미륵불을 다시 조성하면서 봉안한 연기문에는  "(육균병원)'퇴거 후 사찰 각 법당, 각 요사, 각 암자 전부 퇴패(頹敗, 무너지고 깨짐)는 불가형언중(不可形言中, 말로 표현할 수 없음)"라고 당시 상황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또한 "용화전 미륵불은 영위파손(永爲破損, 영원히 파괴)되야 불가견여(不可見餘, 못 볼 지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현충시설은 정신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훗날 전립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현대적인 모습을 갖춘 곳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통도사는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우리가 대광명전에서 참배를 하는 이 시간, 그 이전의 과거에는 아픈 병사들이 희망을 꿈꾸며 자신의 기록을 남겼다. 동일한 공간에 서로 다른 시간이 교차하는 것이다. 구전에 의하면 대광명전과 용화전뿐만 아니라 대웅전, 관음전, 영산전 등 통도사 대부분의 전각에서 군인들이 치료를 받으며 기거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한다. 통도사 경내의 모든 공간들이 한국의 아픈 시대사와 함께한 것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등 역사의 굴곡마다 통도사는 오롯이 민중들의 아픔과 함께했다.

 

  안타깝게도 모든 사찰이 그러하진 못했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사찰들이 왜란으로 불타고, 전쟁의 국난 속에 무너졌다. 통도사는 단순히 현충시설을 넘어서서 기록되지 못하고 사라진 사찰의 아픔을 기록하고 한국불교의 호국정신을 드높여왔다.

통도사는 여전히  '남아 있는 역사'이다. 통도사 도량을 거닐며 지켜낸다는 것, 지켜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바란다.

 

 

 

 

 

 

월간통도 20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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