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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비각

 

  건축물은 목적과 쓰임에 따라 지어집니다. 통도사 가람의 중간 전각인 대웅전을 비롯해 관음전,  명부전, 응진전, 용화전, 영산전 등 '전殿' 자가 붙은 곳은 불보살님을 모시고 있으며 위계가 높은 건물입니다. 또 응향각, 범종각, 산신각, 가람각 등은 전에 비해 위계는 낮지만 뚜렷한 목적을 갖고 건립되어 가람의 일부를 이루는 건물입니다.

  그렇다면 통도사에서 가장 큰 건물은 어딜까요? 대규모의 법회를 개설하기 위해 건립한 설법전입니다. 1992년 당시 국내 최대 목조건물로 건립하여 강당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500평의 규모에 2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가장 작은 건물은 어딜까요? 기붕만 있고 벽이 없으며 사람이 아닌 다른 것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건물입니다. 바로 세존비각世尊碑閣입니다. 비碑란 공적을 오래도록 전하려는 것이요, 각閣이란 다시 그 비碑를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한 것이다. 세존비각을 지으며 지은 기문(세존비각비, 1792년)의 일부입니다. 다시 말해 1706년 세워진 사바교주석가여래 영골사리부도비를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는 아주 작은 건물이란 뜻입니다. 비각은 1792년 세워졌으니, 비석보다 86년 후에 지어진 것입니다.

  세존비각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가장 근접한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문에는 '사리' 관련 내용이 있으므로 부처님 진신사리에 대한 설명과 역사에 대해 상세히 기록을 남겨 금강계단 가장 가까운 곳에 세워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문화재 해설서인 것이지요.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사리부도비

  사바교주석가여래영골사리부도비에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사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 당시 왜적으로부터 부처님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스님들의 행적'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1706년에 비석을 세웠을까요?

 

                    명나라 홍무 10년(1377년) 정사년에 왜구가 양주에 들어와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월송대사가 구덩이를 파서 숨겼다.

                    다시 찾아서 짊어지고 도망가는데 추격이 급해지자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려 벗어날 수 있었다.

 

  사리에는 예나 지금이나 범절 할 수 없는 신성한 가치가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다비 이후 여러 나라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다툼 직전까지 갔다는 기록을 보면, 사리는 '신성한 보물'로서 훔치고 싶고 갖고 싶은 대상이었을 겁니다. 왜구들이 끊임없이 수탈해가려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1377년에는 사리를 온전히 지켜냈지만 다시 또 사리는 수탈의 위기를 겪습니다.

 

 

                 선조 임금 임진년(1592년) 왜구가 크게 전쟁을 일으켜

                 영남 지방이 먼저 왜군의 침입을 받아 죽음과 불태움을 당하게 되었는데

                 금강계단도 그 화를 면할 수 없었다. 마침 사명대사 유정이

                 의승장으로 온 힘을 다하여 사리를 완전하게 지켰다.

 

  왜적들이 끊임없이 사리를 수탈하려 했지만 그때마다 통도사 스님들은 사리를 지켜냈습니다. 하지만 언제 다시 빼앗길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사명대사 유정스님은 금강산에 있는 휴정대사에게 사리를 전해며 지켜주시기를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고민하던 휴정스님은 사리를 다시 남쪽으로 내려보냈습니다.

 

               영축산은 수승한 곳으로 문수보살의 명을 받은 자리이다· · ·.

              저들의 뜻을 관찰해보면 얻고자 하는 것은

              황금과 구슬이지 믿음의 보배는 아니다.

              그러니 전과 같이 단에 봉안하고 수리하는 것이 좋겠다.

 

  사명스님은 휴정스님의 뜻을 이해하고 금강계단을 다시 온전히 수리하여 모셨습니다. 그리고 1706년 계파 성능대사가 금강계단을 중수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성능대사는 마지막 문장에서 "내가 방장산으로부터 와서 백 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성골을 외람되어 봉안하고 예를 올리며 보단을 중수하고 비석을 새겼다. 일을 마치자 슬픔과 감격으로 눈물을 쏟으며 삼가 발문을 쓴다."고 남겼습니다.

 

  세존비각이 건립된 목적은 비석을 보호하기 위함이지만, 그 숨은 뜻은 역사의 기록을 후대에 온전히 전하고자 함이었을 겁니다. 사실 비문의 내용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일반인들이 읽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만 사리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며,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금강계단을 지켜온 스님들의 마음은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작은 건물 속, 가장 깊은 이야기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월간통도. 2023.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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