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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사기」 외에도 다른 기록들을 찾아보면 김대렴 이전부터 차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사실로 드러나고 있으나, 문제는 우리나라에 차 씨앗이나 차 밭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신라시대 당시 양반가 귀족, 화랑들이 차를 즐겨 마시고, 스님들이 차 공양을 올렸다는 기록은 다수 나오지만 이 차가 수입된 것인지, 재래종 차인지, 차 씨앗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통도사」을 살펴보면 이에 대한 해답을 기록으로 찾을 수 있다."

 

  절의 사방 장생표의 터에는 삼천 대덕방으로 나누어져 있고, 동네 남쪽에는 포천 산동이 있는데 1천의 대덕이 사는 방이다. 북쪽 동을산에 있는 다촌은 차를 만들어 절에 바치던 곳이다. 절에 바치던 차 부뚜막과 차샘이 지금도 남아 없어지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이 다소촌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장율사의 화향제자인 조일스님이 화향하고 남는 여가에 동봉에 가서 산천을 관람하고, 띠집을 짓고 살며 장생표를 설치하고 생애를 마감했다. 그 뒤 명하기를 조일암이라 했다. 사방 장생표를 세운 위치에는 논밭이 동남으로 펼쳐져 있고 붇다촌인 평교는 거화군의 경계이다. 또 동서의 원에는 3천 대덕들이 항상 나누어 살았다. 「통도사 사적기」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

차를 따르는 모습

   

우리나라에 차문화가 828년부터 시작됐다고 본다면 일본의 805년보다 늦다. 그런데 일본보다 한국은 지리상으로 중국과 더 가깝고, 과거 승려들이 중국 유학을 다녀온 시기를 보더라도 일본보다 빨라야 함이 타당해 보인다. 김대렴 이전부터 우리나라에 차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성환 원장은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에 주목했다.

 

  통도사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사적기에는 차 역사에 관한 내용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적기를 보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나온다. 통도사는 차밭과 차를 만드는 곳이 동을산에 있었고, 이곳에 차를 만드는 부뚜막과 차샘이 있었으며, 그곳에 자장율사의 화향제자 조일스님이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울산시 언양읍에는 조일스님의 이름을 따서 만든 조일리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이를 근거로 한다면 자장율사가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 차밭을 같이 조성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나라 차문화는 김대렴보다 180여 년 정도 앞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라시대 차문화는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씨앗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로 자리 잡고 있었으나, 사실 그 이전부터 차문화는 우리나라에 활성화되어 있었고 그 증거가 바로 자장율사의 화향제자 조일스님과 통도사인 셈이다.

 

  자장율사는 통도사를 창건할 당시 황룡사를 중창하고 태화사를 창건했다. 그렇다면 통도사에만 차밭을 만들었을까? 세 사찰에 모두 차밭을 조성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통도사의 차밭이 울주군 상천리 장생표지석이 있는 곳이라면, 황룡사와 태화사의 차밭도 절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 거리상으로 추측해 본다면 황룡사의 차밭은 울주군 언양의 다개리이고, 태화사의 차밭은 울산 중구 다운동으로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자장율사가 동시에 중 ·창건했다는 3사 중 황룡사와 태화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통도사만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통도사가 가진 사적기 기록으로 볼 때 한국 차문화의 태동을 알리는 기록상 가장 오래된 차밭을 통도사가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록과 흔적이 통도사가 불지종가이자 다지종가임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자장율사의 화향火香제자, 조일스님

 

  통도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차밭을 가진 곳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자장율사의 화향제자 조일스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화향'이라는 단어를 두고 일부는 불전에 향을 올리는 노전스님으로 보기도 하고, 법맥을 이은 제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화향제자를 현재의 노전과 같은 역할로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는 것이 노 원장의 설명이다. 우선 노전스님의 거처는 예외 없이 법당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조일스님의 거처인 조일암과 통도사의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다음으로 노전을 화향이라는 직함이 붙는 인물이 다수 나와야 함에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 원장은 화향을 조일스님에게만 붙여진 특별한 칭호로 생각하고 제다 용어에서 그 뜻을 찾았다. "저는 화향을 제다 용어에서 그 뜻을 찾았다. "저는 화향을 제다 용어로 보았습니다. 제다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불 조절 기술을 화향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조일스님이 통도사 다소촌에 거처하며 화향하였다는 것은 그곳에서 차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특히 그를 제다 공정에서 화향 기술이 뛰어났던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체 문맥상으로 보았을 때도 자연스럽게 해석이 되기 위해서는 스님이 화향한 후 여가에는 산천을 관람하였다고 하는데 제다 공정의 피곤함을 잊기 위해 휴식차 산천유람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통도사 차밭을 자장율사의 제자 조일스님이 관리 감독하고 제다에도 직접 관여하였다는 사적기의 기록은 「삼국사기」의 "신라의 차는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는 이야기와 부합된다. 그렇다면 신라의 차문화는 7세기부터 시작됐으며, 그 중심에는 자장율사와 조일스님, 통도사가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적기는 한국 차문화사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사료로 볼 수 있다.

 

◈통도사 차문화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나아가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이신 중봉 성파 대종사께서 우리나라 차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한 원력으로 설립한 통도사 차문화대학원이 3년 차를 맞았다. 차문화대학원은 노성환 원장을 중심으로 60여 명의 다인이 활동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행다가 아닌 불교에 기반을 두고 차에 관한 인문학적 소양을 길러 내는 교육을 한다.

 

  노 원장은 차문화대학원이 설립될 당시부터 통도사와 차 역사에 대해 생각했다. 차 전래에 관한 이야기는 가야시대 허황옥 등 김대렴 외에도 많은 설이 있지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통도사에는 사적기에 의한 기록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이제라도 밖으로 끄집어내어 새로운 빛을 보게 하는 것이 노 원장의 바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바탕으로 계승 발전시켜 통도사 중심의 차문화를 새롭게 밝혀 나가고자 한다.

 

  1990년대 종정예하의 원력으로 통도사에 3000여 평의 차밭이 조성되었다. 이후 해마다 대중스님들이 함께 채다와 제다 원력에 동참하여 1300여 년 전 다소촌의 맥을 잇고 있다. 통도사 스님들이 정성으로 수확한 찻잎은 부처님 전 감로다가 되고, 맑은 기운은 도량에 스미어 불자들에게 향기로운 법향이 된다.

 

 

 

월간통도 202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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