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일반적으로 승려들은 유명을 달리할 경우 화장을 하고, 그때 수습된 사리나 유골을 부도에 안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큰 사찰 입구에 늘어서 있는 부도는 모두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인도에서 전래한 화장 문화와 우리 전통의 매장 문화 사이에 지난한 갈등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어 흥미롭다.

다비식

 

화장火葬은 유목문화의 전통

  유목민은 가축을 데리고 초지를 따라 이동하며 생활한다. 그렇다보니 무덤을 쓰고 이를 지속적으로 보호·관리할 수가 없다. 또 유목민들에게는 그들의 생활 터전인 초원이 단조로워서 하늘에 대한 외경의식이 더 크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장례 풍습이 바로 화장 火葬 이다. 유목민들은 화장을 하면 이때 발생하는 연기를 타고 죽은 영혼이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인도 아리안족의 오화설五火說이나 유대인들의 번제燔祭가 이를 방증한다.

 

  이와 같은 화장 문화는 불교를 타고 전래되어 우리 문화에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쓰던 물건을 소각해서 망자에게 전달해 준다는 관념이 있고 또 불교에서는 7월 보름이 우란분절에 조상들을 천도하면서 노잣돈인 지전이나 종이옷 등을 태우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한다면 유교의 소각 문화 역시 실크로드를 넘어 들어온 인도불교의 전통에 의한 것일 뿐이다.

농경문화와 매장

  농경문화는 유목문화와 달리 정주定住 문화다. 매장 문화는 이러한 농경문화의 유산이다. 또 농사는 소위 말하는 '머릿수'가 자산이기 때문에 대가족이 훨씬 유리하다. 이런 연유로 농경문화에서는 최고 어른을 정점으로 하는 문화와 이에 잇따른 조상 숭배가 발달하게 된다.

 

  하지만 동아시아의 매장 문화가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은 봉분의 형식은 아니었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에는 공자가 최초로 어머니인 안징재의 무덤에 봉분을 만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인즉 공자가 어린 시절 가난 속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을 표시할 만한 석물을 갖출 수 없어 봉분을 만들어 표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봉분에 벼락이 떨어져 무덤이 파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러자 공자는 고인들이 하지 않던 것을 자신이 했기 때문에 하늘이 벌을 내린 것이라고 자책한다. 이 기록은 봉분이 만들어지는 것이 공자에게서 시작되고 그 이유가 무덤을 표시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즉 공자 이전의 무덤은 봉분이 없는 평장에 석물을 이용한 표지가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오늘날 중국 산둥 성 취부의 공자 무덤 즉 공림이나 추성의 맹자 무덤에 가 보면 무덤 위로 거대한 나무가 자라서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보면 나무를 통해서 재생한다는 고대의 종교적 관념이 잔존하는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요즘으로 치면 수목장과 연관해서 이해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화장이 아닌 매장된 고승들

  인도불교가 동아시아로 전파되면서 준 충격 두 가지를 꼽으라면 노출 문화와 화장을 들 수 있다. 삭발이나 오른쪽 가슴을 드러내는 노출은 감싸고 여미는 것에 익숙한 동아시아인들에게는 해괴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 문화적 충돌이 《홍명집》의 「사문단복론」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화장도 마찬가지다. 장례나 묘제 및 상 · 제례는 전통이 비교적 잘 고수되는 분야다. 변화가 늦고 바뀌더라도 다른 것을 온전히 수용하는 경우가 드물다. 실제 신라인의 특수한 묘제 양식 때문에 고구려와 백제를 한 묶음으로 그리고 신라를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 전통을 갖는 다른 한 묶음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정부의 대대적인 노력에 의해 모제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상  · 제례는 여전히 전통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다.

 

  동아시아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에도 문호적인 저항에 의해서 수백 년 이상, 승려들조차 화장을 하지 않았다. 중국 저장성 천태산의 지자 대사 육신보전에 가 보면 천태종의 시조인 천태 지자 대사를 매장한 뒤 그 위에 탑을 세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지자 대사의 수제자인 장안 관정도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즉, 이분들은 처음부터 화장하려는 생각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적인 장례 문화의 영향으로 육조 혜능이나 구화산의 김지장 스님과 같은 분들도 육신이 썩지 않는 등신불이 될 수 있었다. 만일 이분들이 부처님처럼 열반하시자마자 화장되었다면 육신이 썩지 않는지 알 수 있는 방법조차 없었을 것이다.

 

  고승의 매장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한 경우는 달마 대사가 아닐까? 달마 대사의 이야기에는 달마가 죽고 난 뒤 서쪽에서 돌아오던 사신이 짚신 한 짝을 들고 가는 달마를 마주쳤다는 것이 있다. 사신이 이를 국왕에게 보고하자 국왕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무덤을 파게 하였는데 관 속에는 짚신 한 짝만 있었다는 것이다. '수휴척리 手㩗隻履'라고 하는 유명한 일화인데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달마 대사도 열반한 뒤 화장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고승들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고승의 무덤인 부도가 있으면 당연히 그 속에는 화장한 사리 등이 안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연대가 올라가는 부도들을 보면 부도 안에 사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도 아래에 석관이 있고 그 속에 승려의 뼈가 안치되어 있다. 즉 화장되지 않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을 이룩한 옥룡지 도선국사다.

 

  도선은 선승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에게는 풍수의 대가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런데 도선의 도호인 옥룡지를 딴 전남 광양 옥룡사지의 도선 부도를 1994년부터 발굴하는 과정에서 부도 밑에서 유골을 안치한 석관이 발견된 것이다. 이러한 석관 유적은 국립중앙박물관 외부에 전시된 보불 제265호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부석관 등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석관들을 보면 성인이 들어가기에는 무척 작은 크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3년상 과정에서 초분草墳을 쓰거나 가묘假墓를 만들어서 살과 근육 등을 녹이고 이후 뼈만 추려서 석관에 모셨기 때문이다. 한자의 장례 장葬 자를 보면 아래에 평상을 놓고 위에 시신을 안치한 뒤 그 위를 풀로 덮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대의 장묘 풍습을 전해 주는 글자로 초분의 설치 양상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또 신라 때에는 초분이나 가묘 후 뼈를 추려서 골호에 담았는데 이 과정에서 좋은 뼈와 나쁜 뼈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 이것이 제도화된 것이 성스러운 뼈(성골)와 진짜 뼈(진골)로 구분하는 골품제이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전통적인 장묘법이 불교와 석이면서 매장한 후 부도를 건립하는 특수한 양태가 발생하는 흥미로운 모습을 환인해 보게 된다.

능지탑의 미스터리

  우리는 스스로를 일러 '단일민족'이라고 표현하지만, 이런 개념이 생긴 건 고려 때가 처음이다. 고려 중기에 몽골이 침략하면서 국론을 결집할 필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당시에 이런 개념이 없었음은 당연하다. 그러나 신라의 삼국 통일은 국가의 안정 및 번영과 발전을 위한 단일화의 필연성에 직면하게 된다. 이를 삼국의 공통분모인 불교를 통해서 시도하는 이가 바로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사후에 화장을 해 장묘법에 일대 변화를 준 인물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본 도선이 통일신라 말기의 인물임에도 화장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때 문무왕의 화장이 얼마나 획기적인 사건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대전환의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서 통일신라는 문무왕의 화장지에는 능지탑 혹은 연화탑이라고 부르는 탑을 건립하게 된다. 능지란 왕릉을 대신한다는 의미이고 연화는 방형의 탑신에 연꽃잎이 빙 둘러서 조각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 능지탑은 동아시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하고 거대한 형태다. 현재의 모습은 처음부터 이런 형태는 아니었으며 무너져 있던 것을 수십 년 전에 고구려의 장군총을 연상시키는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정방형으로 되어 있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다만 그 정확한 형태를 알 수 없어 주변에는 많은 부재들이 정리되어 있는 실정이다. 아마도 정방형의 탑 형식에 4면에 불상을 안치한 꼭대기가 평평한 3층의 피라미드형으로 탑의 정상에는 문무왕을 위한 재실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유행하던 목탑 양식에 왕릉 구조를 합하고 여기에 재실을 추가한 아주 창의적인 구조라고 하겠다. 그러나 너무 창의적이면 뒷사람이 정확히 알기 어려운 법 능지탑은 오늘도 그 원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채 세월의 영광만을 말해 주고 있다.

 

 

 

자현스님  "사찰의 비밀" 중에서

반응형

+ Recent posts